DNA에 새겨진 고대 바이러스 유전자 ; 2019년 12월에 발견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인류는 이외에도 다양한 팬데믹을 겪어왔다.
유전자에 계승된 과거 바이러스 잔재에 대해 전문가가 온라인 학술저널 ‘더컨버세이션(Theconversation)’에 해설했다.
에이즈(HIV)와 같은 레트로 바이러스는 자가 복제를 위해 숙주에 침투해 자신의 유전물질을 주입한다.
이렇게 복제된 바이러스는 ‘프로바이러스(provirus)’로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부모에서 자식에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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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류의 조상을 괴롭힌 바이러스 중 일부는 난자나 정자 등 생식세포
감염 능력을 획득해 ‘인간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HERV)’로 자손에게 계승된다.
미국 터프츠대에서 HERV를 연구하고 있는 에이단 번 박사에 따르면 인간 게놈(genome·유전체) 중 무려 8%는 HERV가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30종의 HERV가 발견됐다. 유사한 바이러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영장류 게놈에도 남겨져 과거 이들 동물 사이에도 널리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선 연구를 통해 HERV 유전자가 종양과 같은 질병 조직 및 인간 배아 발생 과정에서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됐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의 체조직에서 HERV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번 박사 연구팀은 전신에서 채취된 1만4000개 이상의 샘플 게놈을 수록한
데이터베이스에서 ‘HML-2’라는 HERV 그룹을 조사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HML-2는 HERV 중에서도 비교적 새롭게 활성화된 것으로 약 500만 년 전 멸종됐지만,
현재까지 몇몇 프로바이러스가 바이러스 단백질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분석 결과, 현재까지 활성화 상태인 HML-2 프로바이러스는 37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연구팀이 조사한 54개 조직 샘플 모두에서 이들 프로바이러스 중 적어도 1종이 활성화됐다는 증거가 나왔다.
고대 바이러스의 단편이 여전히 인간 게놈에 존재하고 단백질 합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조상에게 발생한 팬데믹 흔적이 현대인의 몸속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HERV가 질병의 원인이 되는지 여부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일부 연구에서 HML-2 바이러스 유사 입자가 암세포에서 발견된 바 있고,
질환 조직의 HERV 유전물질은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다발성경화증·조현병 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DNA에 새겨진 고대 바이러스 유전자
지금까지는 질병의 지표로 HERV 유전자가 이용되거나 HERV 유전자를 표적으로 한 치료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강한 체조직에도 HERV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 이번 연구를 통해
HERV 유전물질과 질병이 직접적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부상했다.
이는 레트로바이러스 유전자 및 단백질이 치료제의 표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HERV가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할 가능성도 지적했다. 가령 인간이나
동물 게놈에 내장된 대표적인 HERV인 신사이틴(syncytin-1)은 태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임신으로 태어나는 모든 포유류의 새 생명은 고대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HERV로 만들어진 단백질의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다.
또 쥐·고양이·양 등은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ERV)를 이용해 바이러스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이러한 ERV는 완전한 바이러스 입자 자체를 합성할 수 없지만, ERV의 근원 바이러스가
숙주 체내에 침입했을 때 세포 내를 떠다니는 ERV가 이를 방해해 바이러스의 자가 복제를 어렵게 만든다.
연구팀은 인간의 HERV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